“수술 모자에 이름 씁시다!” 마취의사 아이디어가 가져온 변화

이예리 기자2019-03-12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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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롭 해킷 씨 트위터(@patientsafe3)
파란색, 혹은 녹색 모자와 마스크를 착용한 의료진들이 우르르 모여 심각한 표정으로 환자를 살펴보는 상황. 의학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장면이죠. 수술용 위생 복장을 잘 갖춰 입고 눈만 내놓은 사람들 수십 명이 모여 있으면 누가 누구인지 구분하기 힘듭니다.

호주 마취전문의 롭 해킷(Dr. Rob Hackett)씨는 실제로 약 20여 명이 모인 대수술 때 의사소통이 꼬여 진땀을 흘린 경험이 있습니다. 그는 온라인 매체 보어드판다에 “장갑을 좀 집어 달라고 동료 한 명을 가리켰는데, 그 뒤에 있던 사람이 자기를 부른 줄 알고 나선 적 있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급박한 수술 상황에서 동료를 바로 식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던 그는 ‘눈에 잘 뜨이는 모자에 이름을 큼직하게 적으면 어떨까’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렸습니다. 동료들끼리 바로 알아볼 수 있으니 의사소통 혼선도 막을 수 있고, 환자들도 한 눈에 이 사람이 무슨 과 의사인지 파악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사진=롭 해킷 씨 트위터(@patientsafe3)
사진=롭 해킷 씨 트위터(@patientsafe3)
그는 이 아이디어가 정말 도움이 되는지 테스트하기 위해 직접 자기 모자에 ‘롭, 마취의(Rob, Anaesthetist)’라고 적은 뒤 동료들의 반응을 살폈습니다. 신종 장난인 줄 알고 웃거나 ‘재미있어 보인다. 나도 적어야겠다’며 가볍게 따라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곧 모두들 이 우스운 모자가 실제로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느끼게 됐습니다.

이름 적힌 모자를 써 본 의사와 간호사들은 “수술 때 뭔가 요청해야 하는데 갑자기 상대방 이름이 생각 안 날 경우가 있다. 이 모자는 그런 시간낭비를 막아 준다”, “재미있는데다 실용적이다”, “환자들도 의사가 자기 이름을 걸고 진료하는 것 같아 믿음이 가고 친근한 느낌이 든다며 좋아한다”, “동료들끼리 더 빨리 친해질 수 있어서 좋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일회용 모자 대신 개인 위생모자에 이름을 인쇄하면 쓰레기도 나오지 않고 일회용품 구입비도 절약할 수 있다며 칭찬이 쏟아졌습니다.

롭 씨가 시작한 ‘모자에 이름 적기’는 곧 일종의 챌린지(장난이나 선행 등을 사진, 영상으로 찍어 온라인에 공유하는 놀이)가 되었습니다. 주변 의료진들은 ‘#TheatreCapChallenge’라는 해시태그를 붙여 이름 적힌 모자 쓴 사진을 인터넷에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유쾌하게 시작된 챌린지가 퍼지면서 의료계 종사자들 사이에 신선한 변화를 일으킨 것입니다.

물론 모든 호주 의료계 관계자들이 롭 씨의 아이디어에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롭 씨는 “일부 나이 많은 의사나 병원 직원들은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며 반감을 표하기도 해요.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점차 바뀌어 나갈 거라 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예리 기자 celsett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