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하면 뭐 하고 살 거야? 나무 깎는 5060 ‘취목족’

동아일보2018-07-02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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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구 한국문화의집에서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 수강생들이 식기를 보관하는 가구인 찬탁을 만들고 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평생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서류만 만지며 살아왔잖아요. 어느 순간 ‘내가 손 쓰는 방법을 잊어버리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컨설팅업체 더랩에이치 김호 대표(50)의 말이다. 그는 66m²(약 20평) 남짓 되는 사무실의 절반을 목공 작업실로 꾸몄다. 수저, 도마는 물론이고 사무실 책상과 의자까지 이 작업실에서 직접 만들었다. 이번 여름휴가 때는 미국 메인주에 사는 목공 장인을 찾아가 연수를 받을 계획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직접 만든 작품을 판매하고 있는 그는 “5∼10년 안에 전문가 수준으로 기술을 끌어올리겠다”고 말했다.

‘손맛 좀 볼 줄 아는’ 중년이 늘고 있다. 목공은 특히 5060세대에게 인기가 많아 취미로 목공을 즐기는 이들을 가리키는 ‘취목족’이란 말이 생겨날 정도다. ‘취미 목수’들의 인터넷 카페는 회원 수가 21만 명을 넘어섰고, 매일 200건 넘는 글이 올라오고 있다.

서울 양천구에서 목공 교실을 운영하는 유우성 씨(61)는 “최근 목공을 배우고 싶다는 사람이 급증했다. 정원이 다 찼는데도 배우겠다는 문의가 이어져 올해는 정원보다 더 많은 수강생을 가르치고 있다”고 말했다.

펑크록 밴드 ‘크라잉넛’을 프로듀싱한 음반제작자 김웅 씨(46)도 틈날 때마다 경기 고양시에 있는 가구 공방을 찾는다. “인생 후반전을 준비하겠다”는 다짐으로 가구 공예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 어느덧 10년차. 전시회를 열 정도가 됐고 은퇴 후에는 전문 목수가 될 계획이다.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와 라이나전성기재단은 지난달 ‘대한민국 50+ 세대의 라이프 키워드’ 보고서에서 가족과 치열한 삶 속에서 잃어버린 자아를 되찾고 ‘다시 태어나는’ 5060세대를 ‘리본(Re-born)’ 세대로 정의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50∼64세 1070명 중 71%가 “생산적인 여가 활동을 원한다”고 답했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5060세대가 원하는 것을 하며 자신을 위해 살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국문화재재단에서 운영하는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에도 이런 이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지정된 이들에게 전통 목공뿐만 아니라 옻칠, 나전칠기, 금속공예, 자수 등 15가지 전통 공예를 배울 수 있다. 수료 후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아 예술가가 된 사람도 있다.

지난달 28일 찾은 서울 강남구 한국문화의집에서는 전통공예건축학교 저녁반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스무 명 남짓한 50, 60대 ‘아재’들이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고 앞치마를 두른 채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조종원 한국문화재재단 문화교육팀장은 “저녁반 수업의 수강생은 절반 이상이 50, 60대 직장인으로, 회사원 교수 건축가 등 직종도 다양하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구 한국문화의집에서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 수강생 송세근 씨(왼쪽)가 황토와 옻을 섞어 바르는 토회칠을 하고 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문진호 씨(56)는 이곳에서 전통자수를 배우는 아내 김애현 씨(55)의 권유로 지난해부터 장롱, 탁자 등을 만드는 소목을 배우고 있다. 건축가인 문 씨는 “작은 한옥을 지어 내가 만든 가구와 아내가 만든 병풍으로 꾸민 후 노후를 보내고 싶다”고 웃었다.

회사원 송세근 씨(59)는 정보기술(IT) 업계에서 숨 가쁘게 살아오다 한 작품을 몇 달씩 걸려 만드는 삶에 매료됐다. 옻칠과 나전칠기를 배우고 있는 그는 “친구들에게 ‘술만 마시지 말고 나전칠기를 배워 보라’고 권한다”며 작업 중인 옻칠함을 들어 보였다.

전문가들은 ‘리본 세대’의 수공예 취미는 더 확산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수공예는 아날로그적 삶으로 회귀하고 싶어 하는 현대인의 향수를 달래준다”며 “은퇴 후 삶이 길어지고, 주 52시간 근무제로 여가시간이 늘어남에 따라 공예를 즐기는 사람이 늘고 그 종류도 한층 다양해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지운 easy@donga.com·유원모 기자